명상수행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에크하르트 톨레

달향~ 2020. 5. 29. 21:44

꽤 두꺼운데 3일만에 다 읽은 책이다. 책읽는 속도가 느린 나이지만 이 책은 너무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특히 불교 명상인 위빳사나(마음챙김)명상을 한 이래 느껴왔던 점과 변화된 점에 대해 생각하면서 되새김질 하듯  읽었고 그러다보니 한장한장 술술 아쉬움이 들 정도로 잘 넘어갔던 책이다. 몇 몇 지인들에게 선물도 했지만 감흥은 다 달랐다. 별로 와 닿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고 다 좋은 말들이긴 한데 그 뿐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 의견들이 내게는 약간 흥미로왔다. 같은 것을 보고 읽어도 이렇게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구나! 같은 것을 보았다고해서 상대방에게 나와 같은 느낌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이 책에서 에고의 실체를 알아차리고 순수 의식인 '있음'으로 돌아와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삶이며, 삶이 곧 내 자신임을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어떤 공식처럼 딱 아귀가 맞는 글만이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겐 한문장 한문장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마음의 문을 열고 읽는다면, 책을 마친 후 자신의 의식의 차원이 한 단계 높아져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존재의 망각

머릿속에서 절대로 말을 멈추지 않는 목소리라고 당신이 알고 있는 그것은 사실 그칠 줄 모르는 강박적인 생각의 흐름이다.  모든 생각이 당신의 관심을 온통 흡수해 버리고, 머릿속 목소리와 그것에 동반되는 감정에 너무도 동일화되어 모든 생각과 감정 속에서 자기를 망각할 때, 당신은 형상과 완전히 동일화되어 에고의 움켜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에고는 '나'라는 자아의식을 부여받아 반복해서 일어나는 생각 형태들과 조건 지어진 정신적 감정적 패턴들의 복합체이다. 

에고는 무형의 의식인 '나의 있음 I Am', 즉 '순수한 있음Being'이 형상과 뒤섞일 때 생겨난다. 이것이 동일화의 의미이다.
이것이 존재의 망각이며, 근본적인 실수이고, 존재가 개별적인 형상들로 분리되어 있다는 망상이다. 이것이 현실을 악몽으로 바꿔 놓는다. p.85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사르트르의 통찰까지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17세기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 근본적인 오류를 근본적인 진리로 알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로 표현했다. 이것은 "내가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알 수 있는 것이 있을까?"라는 물음에 데카르트가 찾아낸 대답이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임을 깨닫고 생각과 존재를 동등시했다.  즉 정체성-'나의 있음'-을 생각과 동일시한 것이다. 그는 궁극의 진리를 발견하는 대신 에고의 근원을 발견했지만,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 명제 속에는 데카르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간과한 부분이 있음을 다른 유명한 철학자가 깨닫기까지 그로부터 거의 3백 년이 걸렸다. 그의 이름은 장 폴 사르트르였다. 그는 데카르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발언을 깊이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그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면 "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의식은 생각하고 있는 의식과 별개이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때, 그 알아차림은 생각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차원의 의식이다. 그리고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알아차림이다.



만약 자신 안에 생각밖에 없다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자신이 꿈꾸고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꿈꾸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꿈꾸고 있는 사람이 꿈속 모든 이미지들과 동일화되듯이 모든 생각과 동일화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몽유병 환자처럼 살고 있으며, 오랜 기능장애의 마음 습관에 갇혀 똑같은 악몽 같은 현실을 언제나 계속해서 재창조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면 꿈에서 깨어난다. 다른 차원의 의식이 들어온 것이다.

​ 사르트르의 통찰은 깊이가 있었지만, 자신이 발견한 것의 중요성을 완전히 깨닫기에는 그 역시 자신의 생각과 너무 동일화되어 있었다. 그 중요성이란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떠오른 것이었다. p.86



당신 존재의 궁극적인 진리는 '나는 이것이다.'또는 '나는 저것이다.'가 아니라  '나는 있다.'이다.

​ 큰 상실을 경험한 모든 사람이 이런 깨어남을 경험하고 형상과의 동일화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 즉시 자신이 상황과 타인과 불공평한 운명과 신의 피해자라는 강력한 정신적 이미지나 생각 형태를 만든다. 이러한 생각 형태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분노, 원한, 자기 연민 등의 감정들에 강하게 동일화되기 때문에, 이것이 상실을 통해 붕괴된 과거의 동일화 대상들의 자리를 금세 대체한다. p.89



비극적인 상실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그것에 저항하거나 아니면 항복한다. 억울해하거나 깊은 원한을 품는 사람도 있으며,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사랑이 더 커지는 사람도 있다. 



항복은 있는 그대로를 내적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삶을 향해 자신을 여는 것이다.  저항하면 내면이 움츠러들고 에고의 껍질이 단단해진다. 당신은 닫힌다. '부정적인 상태'라고도 부를 수 있는 내적인 저항 상태에서는 어떤 행동을 취해도 더 많은 외부적 저항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때 우주는 당신 편에 서지 않는다. 삶은 당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셔터가 내려져 있으면 햇빛은 들어올 수 없다. 내적으로 항복할 때, 저항하지 않을 때,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그때 만약 행동이 가능하거나 필요하다면, 당신의 행동은 전체와 조화를 이룰 것이고, 내적으로 열린 상태일 때 당신과 하나가 되는 창조적인 지성과 조건 지어지지 않은 의식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것이다. 

주변 상황과 사람들이 당신을 돕고 협조적이 된다. 불가사의한 우연들이 일어난다. 만약 어떤 행동도 가능하지 않다면, 당신은 저항의 포기와 함께 오는 평화와 내적 고요 속에서 휴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