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 부터 사마타 수행(호흡수행)을 다시 시작했었다.
(미얀마 파욱 이후 고엔카 마지막10일코스 참여가 2018 이었으니
3년 만에 다시 하는 사마타 수행인 셈이다.)
이유는 그동안 쉐우민 수행을 하면서 장점도 많았지만
일상에서도 아는 마음을 가볍게 알아가며 사마디가 좋아질수록 왠지 멍해지(space out)는 순간들이
많아졌고 그러니 이것저것 자잘하게 실수하고 잊어버리는 일들도 많아졌다.
(2022.1.20 업데이트 : 아잔차 스님의 전통에 의하면 사띠와 삼빠자냐, 사마디가 함께 있을 때
빤냐(지혜)가 생긴다고 한다. 삼빠자냐란 쉽게 말해 '자각'이다.
영어로는 self-awareness, 또는 clear comprehension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나아가
The one who knows(마음의 아는 성질, 아는 마음), 즉 'Buddo', '보디', '보리'를 말한다.
쉐우민수행에서는 (내가 알기로는) 자각self-awareness이라는 용어 대신 "아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 같다.
쉐우민에서는 어느정도 사띠가 유지되는 수행자들에게는 가볍게 사띠를 두되 부정적인 마음이건 긍정적인 마음이건 있는 그대로 사띠하며 아는 마음을 계속 보라고 한다. 이런 수동적인 수행법이 내겐 너무 모호하게 느껴졌고 마음만 따로 떼어 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이유로 마음에만 중점을 두는 수행이 아닌 이 몸과 마음 전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에서 무상, 고, 무아를 보는 사념처(신.수.심.법념처)를 토대로 하는 사띠빳타나 수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맑게 깨어있는 사마디가 없이는 지혜의 증장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2022.1.20 업데이트)
평소의 나였다면 하지 않았을 그런 단순하고 어이없는 실수들...
아마 나이가 들어서 이기도 하겠고 쉐우민의 심념처 수행에 능숙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어쨌든 쉐우민 수행은 내겐 어딘가 모르게 뭔가 부족한 느낌을 버릴 수가 없는... 모호한 수행 방법이었다.
내겐 그랬다는 것이다. 경험을 해보고 배운 점이며, 이에 대해 옳다 그르다 판단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수행을 하는 모든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와지는 것이니 각자의 능력과 수준에 맞게 본인에게 최상의 방법으로 즐겁게 수행하여 목적지에 도달하면 되는 것이다. 단, 내 생각에 정해진 시간에 지혜를 증장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기위해 이 수행은 그리 효과적이지가 않은 것 같다.)
그리하여 집중력을 향상 시키고자(경험상 파욱 스타일의 호흡 수행이 집중력 향상에는 최고였기에)
하루 3-4 시간 씩 아마 2주 정도 해오던 시점 인 것 같다.
좌골신경통(엉덩이와 다리 까지 이어지는 통증이 극심)이 갑자기 너무 심해졌다.(지난 여름 처음으로 밭을 일구느라 무리하여 생긴 디스크염증이 고질병이 되었다.)
허벅지 부터 발까지 전기 통하는 듯 찌릿한 느낌과 저림, 시림,
무엇보다 엉덩이 통증이 심해서 앉은 자세를 유지 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도 통증으로 인해 5일 정도 좌선을 하지 못 했던 날을 제외 하면 거의 한 달 동안
3-4시간 호흡 수행(너무 아플 때는 의자에 앉아서 하기도 함)을 했다.
그러나 수행을 하고 나면 화와 짜증이 나는 날들이 더 많은 것이다(빛을 띄우고 유지하는 것에 너무
초점을 두어 그랬던 것 같다.)
수행이 잘 되는 날(쉽게 사마디에 몰입되거나 빛이 오래 유지 되는 날)은 수행 후에도 마음이 가볍고 기분이 좋았다.
처음 수행을 했을 때 경험했던 선정 경험을 바랬지만 오히려 3년 전 파욱 사마타 수행을 하던 때보다도 수행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속상하고 불만족 스러웠던 것 같다.
3년전에는 적어도 앉은지 5분 이면 바로 숨도 고요해지고 전면에 잔잔한 빛이
나타나며 사마디가 유지 되었는데 이렇게 퇴보하다니 속상한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더 화가 나고
내 자신을 향한 불만족이 커지는 것이었다.
수행 중에는 빨리 빛이 보이고 몰입이 되기를 바라는 탐심과 그걸 이루지 못해 나타나는 성냄이 많이 보였다.
그러다 며칠 전 비구 아날라요(전생관련 영상부터 관심있게 보다가 우연히
"여러 다른 전통의 수행 방법을 대하는 태도")영상을 보게 되었고
마하시 전통의 수행법을 다시 탐구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잠깐 동안 이었지만 호두마을에서 마하시 수행을 하던 그때
수행인생 중 자잘한 지혜들이 가장 많이 생겼었고(어쩌면 그동안 수행으로 쌓아온 자잘한 지혜들이
이 시기에 발현되어 그렇게 생각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수행을 할수록 화와 탐심은 버려지고 그대신 놓아버림과 감사한 마음, 연민심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 현상들을 객관적으로 알아차린다는 면에서
쉐우민 수행과 비슷한 듯 하지만 마하시 수행은 배의 부름 꺼짐을 봄을 통해 멍해지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일상에서도 노팅을 통해 초점에서 흐려지거나 멍해지는 현상(space out)을 막을 수 있는 것 같다.
일종의 닻에 비유 될 수 있을까? 마하시에서는 마음을 붙들어 매기 위한 닻으로 호흡을 보는 대신 부름꺼짐과 노팅을 이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래 업데이트)
(2022.1.20 업데이트 : 마히시 수행을 할수록 이 "노팅"에 대한 거부감과 불편함을 저버릴 수가 없다.
일어나는 모든 정신, 물질 현상에 이름을 붙이고 떠오르는 생각에 '새김'(이름붙임, 노팅)을 할때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되고 이러다보면 잔잔하게 이어지는 삼매의 흐름이 깨어지고 만다.
그래서 7개월 동안(on&off) 하던 마하시 수행을 그만 두었다. 지금은 아잔차 전통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호흡법으로 삼매를 닦고(파욱전통처럼 니밋따에 중점을 두지 않음) 메따 수행으로 메따, 까루나(다른 이들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무딧따(다른 이들의 선업에 따라 기뻐함), 우뻬까(일어나는 현상에 휘둘림없이 평정을 유지함)를 키우며, 좌선과 경행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자세와 행동에서 몸을 보고 느낌과 생각을 조사하며 7각지로 반조하고 이를 통해 무상, 고, 무아를 깨달으며 아직 생기지 않은 바른 생각과 감정은 일으키려고 노력하며, 이미 생긴 화와 욕심, 치심등의 바르지 않은 생각과 감정은 없애도록 노력하는 수행법이다.
5년 6개월간 접해본 초기불교 수행법 중 가장 적극적인 수행방법이며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호흡을 수단으로 마음을 모으고 사띠와 삼빠자냐(또렷한 이해, 또렷하고 바른 자각)를 통해 몰질과 정신의 실상을 보고 조사와 반조를 통해 이미 일어난 장애(오장애를 포함한 부정적 감정과 부정적 마음상태)는 없애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장애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또한 이미 일어난 선(오력과 칠각지를 포함, 긍정적이고 선한 마음상태와 기분mood)은 더욱 커지게하며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는 수행방법이다.
아잔차전통 역시 쉐우민, 마하시전통과 마찬가지로 지혜를 증장시키는 위빠사나 수행방법이지만 개입없이 수동적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질문하고 조사하며 반조함)하여 바른 법은 택하고 바르지 않은 법은 버려서(칠각지중 택법각지라고 할수 있을 것 가탇.) 마음의 바른 상태를 유지함을 중시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위에 언급했듯이 아잔차전통이 위 두 전통과 다른 점은 호흡을 통해 사마디를 증장시키는 것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파욱전통에서 중요시하는 니밋따를 아잔차전통에서는 빛이나 그외 시각적 현상을 단순히 무시하라고 지도한다. 이런 시각적 현상들은 마음이 만들어 낸 현상이며 실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호흡명상은 4대중 풍대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호흡수행에서 시각적 현상에 집중하는 것은 더더욱 바르지 못한 수행법이라고 한다.
아잔차 전통에서는 사띠와 함께 항상 삼빠자냐(자각)가 있도록 수행할 것을 강조한다. 그렇게 하면 고요하게 사마디가 유지되는 중에도 멍해지거나(일상 수행에서 또렷한 자각이 없는 사마디 상태에서의 고요하지만 멍한 상태)나도 모르게 생각에 빠지는 일이 적어진다. 쉐우민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잔차수행에서도 조사와 반조를 통해(지혜로 하는 조사와 반조, 탐심과 진심으로 하는 반조가 아닌) 생겨난 지혜는 선한 마음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아잔차전통의 수행법은 주로 위에 설명한 방법으로 하게 되지만 고엔카전통처럼 틀에 맞춘 정해진 룰이 없다. 그 이유는 아잔차스님은 제자에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그에게 맞는 수행방법을 각각 다르게 가르치셨다고 한다. 물론 대중에게는 주로 호흡법으로 시작해 몸을 보고 호흡법으로 집중된 의식을 확장하여 육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반조하고 조사하는 방법을 설하셨지만 개개의 수행자에게는 각각 그에 맞는 독특한 방법들로 설하셨다고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수행방법이 이거다(전해지는 여러 수행전통 방법 중). 라고는 어떤 경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한다. 그러니 각각의 수행전통에서 그들이 이 수행방법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며, 부처님께서 수행법을 가르치실때 이 방법으로 가르치셨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러니 꼭 한 가지 전통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법이라고 생각하여 바른 법에 대한 어떤 반조나 의심없이 수행한다면 훗날 깊이 후회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해봐야 한다.
아잔차스님의 법문을 열심히 찾아 듣고 법문집(주로 아잔차스님의 법문을 제자들이 영어로 번역한 pdf파일을 매일 시간내어 읽고 있는데 지금까지 내가 수행해 본 방법 중 가장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그래서 누구나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잔차 스님의 법문은 간단명료하며 솔직하고 시원스럽다. 어려운 담마(법, 자연이치)도 쉬운 비유를 통해 설명하시기에 이해하기도 참 쉽다. 어려운 용어로 우회적으로 표현되거나 추상적이지 않아 더 신뢰가 간다. 아마 그런 이유로 60년대 수많은 유럽과 북미의 심리학자들이 그의 전통을 배워 현대 심리학에 이용하게 된건지도 모르겠다. 심리학을 전공할 당시에는 불교명상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에 관련성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불교 수행을 하면서 불교 공부를 조금씩 하다보니 현대 심리학, 특히 인지심리학의 접근법은 불교 수행법(특히 아잔차전통의)에서 단지 종교색을 제거하고 도구화하여 일반인이 거부감없이 좀더 쉽게 적용하게 한 것임을 잘 알데 되었다. 2022.1.20 업데이트)
다시 아날라요 스님의 다른 여러 전통의 수행법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야겠다.
다른 전통의 수행 법을 대하는 아날라요 스님의 유연한 태도에
그동안 교육 받아 왔던 그래서 내 안에 내제되어 있는 관념 즉,
"한 가지 수행 법을 택했으면 그 방법 만을 고수해야 하며
이것 저것 혼합 해서는 수행에 진전이 없다."는 경직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과감히 파욱스타일의 사마타 수행을 중단 후 마하시 수행을 다시 하게 되었지만 결국은 아잔차 전통의 수행을 찾게 되었다.
바른 판단없이 한 가지 수행법만 고집해 오다 30년 후 어느 날 '이 방법이 아니었어.' 라는 깨달음이 뒤늦게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진전이 조금 더딜지언정 내가 직접 하는 수행의 경험을 통해 불법이면서도 내게 맞는 방법을 찾아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 치명적 실수를 피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수행을 시작한 2016년 부터 나는 이런 저런 왠만한 불교 수행법(초기불교)은 한번 씩 다 해본 것 같다.
각 수행법 마다 장단점이 있지만 어느 수행법도 해서 후회되는 수행법은 없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사마타는 사마타 대로 각각 다른 전통의 위빠사나는 각각의 방법 대로 나의 통찰력을 증진 시켰고
마음을 정화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 느껴지는 죄책감(한 가지 방법을 고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오장애 중 한 가지인 "의심"이 해결이 되지 않음 )과 불만족 스러움(최적 또는 최고?의 수행법을 찾지 못함)은 어떤 수행을 하면서도 떨쳐 지지가 않았었다.
그리다 지난 한 달간 다시 해왔던 파욱 사마타 수행의 부작용과 우연히 보게 된 아날라요 스님의 영상은 시의적절 했다.
그래서 참으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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